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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벽서 혹은 문학의 승리 #3

  1. #3. 사법기관의 권력작용 그리고 신화


  앞서 쥐벽서 사건을 다루는 사법기관이  과거의 신화로 오늘날의 기표를 해석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렇기에 새로운 신화에서 의미작용하며 사는 대중들에게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고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이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신들의 의미작용에 결함이 있음을 발견하지 못 하며, 더 나아가 한 개인의 인권을 침해하는 실행(practices)까지
  할 수 있게 되는 원인은 그들의 ‘언어’때문이라 생각한다.


   쥐 벽서 사건을 다루는 사법기관들은 마치 장난감 딱총을 들고 놀이터를 점유하는 아이들에게 수갑을 채우는 행동을 하는 듯 했다. 낙서를 하는 데 쓰인 스프레이와 물통 등의 미술 도구는 범죄의 증거도구가 되었고, 미술 도구를 버리고 떠난 대학강사와 그의 제자는 범죄현장에서 도주 시도를 하다 붙잡힌 현행범이 되었다. 아이들이 딱총은 사법기관들의 언어형식 속에서 진짜 총과 같은 범주에 들어갔고, 아이들이 점유한 놀이터 또한 국제공항과 같은 중요한 공간과 동일한 범주에 속하게 된 꼴이다. 장난감 총을 든 아이들은 테러리스트를 설명할 때와 유사한 기표로 설명 되었듯이 쥐벽서 사건은 사법기관의 용어 속에서 재정의되었다. 


   언어가 어떻게 사용되고, 언어의 사용이 다른 사회적 문화적 행위들과 어떻게 관련 되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시각은 후기구조주의자 학자들의 경향이다.




  대표적인 사람으로 미쉘 푸코를 들 수 있는데, 그는 특정한 용어체계와 권력의 관계를 설명했다. 즉 언술 관계가 권력 관계를 만든다고 하였는데, 언술 체계는 기존 제도들이 언어를 사용할 때 어떠한 방식으로 쓰이는지 설명한다. 기존의 제도는  언어를 정의(definition)하거나 배제(exclusion)하는 과정을 통해 권력을 만든다. 
 

   쥐벽서 사건을 제지한 사법기관은 낙서는 ‘범죄’로 부르고, 낙서를 한 사람은 ‘범죄자-현행범-피고’로 정의되는 과정을 통해, 그의 행위가 공공미술의 해프닝적 요소를 갖춘 ‘예술행위’ 임과 거리의 ‘예술가’로 불리는 언어가 배제가 된다.  위와 같은 과정은 대학강사 박정수 씨의 행동에 대해 말할 내용도 정해준다. 제한된 이야기만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 안에서 의미작용은 대중들이 공유하는 신화와는 격리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통에 문제가 없게된다. 
 

   
푸코식으로 다시 말하자면 언어의 쓰임이 권력 형성의 수단이 된다고 한 것이며, 그가 뜻하는 바는 특정 언술 체계(discourse)나 언술진행적(discursive) 구조들이 어떤 주어진 소재에 대해 말할 내용을 정해준다는 것이다.


  사법기관은 사건을 바라보는 세계관이 시대와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권력을 유지하는데 사용해 온 언어체계들을 이번 사건에도 유려하게 구사하였다. 자신들의 용어로 재구성하고 그 언어 속에서 의미간의 관계를 찾는 노력은 공정하고 명백해야 할 사법기관의 목적에 맞지 않는 행동에도 합리적이라고 느낄만한 당위성을 형성하게 끔 돕는다. 실상 그들은 자신들만의 언어 속에서 사고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쓰는 언어가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라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사법기관의 담론으로 진행되는 이번 사건의 판결과정에서 예술가들과 시민들이 탄원서로 제출한 문장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언어는 ‘풍자’와 ‘해학’이었다. 
 



 관련 글: 영화감독들의 탄원서 전문(오마이뉴스)


  탄원서는 풍자와 해학을 법원이 이해하는 태도를 보여달라는 취지였다. 표현의 자유라는 민주주의적 가치를 근거로 논리를 전개하지만, 사실 풍자와 해학 두 용어는 예술의 사회적 가치를 설명하는 언어이다. 예술의 사회적 가치가 함의된 두 용어를 푸코식으로 보자면 예술이 가진 담론의 구조이다.

  결국, 탄원서는 예술의 담론을 사법기관이 인정해 줄 것을 요청하는 방식이었으며 판결은 사건을 바라보는 검찰이 가진 구시대적 신화와 그들의 담론, 그리고 예술의 담론이 절충된 결과로 나타났다.
 



  판결문은 아래와 같은 내용이었다.
  
  해학적 표현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기에 검찰의 구형보다는 양형하나, 쥐 그림을 그려 홍보물을 훼손하는 것이 G20 행사에 손실이 적지 않았고, 헌법에서 보장하는 예술과 표현의 자유를 벗어났다는 취지로 유죄판결을 내렸다.


#4. 권력작용의 아이러니
 


  그림을 그린 대학강사는 낙서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이유를 재차 묻는 검찰의 조사 과정에서 여러 시간을 구속 조사 당했다. 어느 덧 중대시간에 주도자로 검찰에 의해 정의된, 대학강사 박정수씨는 그 대단한 사건에 관계된 인물을 말해야하는 상황 속에 처하게 된다.
  설령 피고가 말하지 않더라도, 말하지 않는 것들의 의미들이 사법기관의 조사를 통해 구성될 수 있다. 그들의 수사행위는 피고의 통화 기록, 이메일,
  활동내역 등의 삶의 흔적 들이 합법적으로 수집하며 자의적으로 가정한 사건의 증거들로 선별될 여지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쥐벽서 사건에서 선별된 증거들로 만들어진 의미가 사건의 중대성을 강조하는데 쓰였다.

  검찰은 현 정부에 대한 ‘조직적 저항’으로 파악할 만한 증거들을 수집되었다고 한다. 이런 행위는 사법기관이 말하는 ‘무죄추정의 원칙’과 어떠한 관계도 없다. 원칙은 사법 행위의 정당성에 확신을 심어주는 신화로써의 기능만을 맡을 뿐이고, 그들이 구성한 지극히 합법적인 증거 속에서 피고는 그들이 정의(definition)한 정의(justice)를 해치는 범죄자가 되어간다. 롤랑바르트의 말처럼, 신화가 특정 상황(사법부의 비윤리적 행위)을 자연스럽게(합법적)만드는 역할을 맡은 것이다.

    

 

  아래는 쥐벽서 사건의 공판장에서 검사가 피고의 죄를 설명하며, 구형할때 한 말이라고 한다.

  

“이 포스터를 보십시오. 청사초롱은 예부터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쓰는 물건입니다. 그런데 이 청사초롱을 마치 쥐가 들고 있는 것처럼 그림을 그려 넣었습니다. 원래 포스터에는 누가 청사초롱을 들고 있는지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누구인지, 누구여야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G20 대회를 통해 선진국으로 도약하고 국가의 번영을 이루겠다는 우리 국민들, 우리의 아이들이 있어야 할 자리입니다. 피고 박정수는 우리 국민들과 아이들로부터 청사초롱과 번영에 대한 꿈을 강탈한 것입니다. 빼앗은 것입니다! 이런 피고인 박정수에게 징역 10개월을 구형합니다. 함께 범행을 모의하고 현장 부근에서 박정수와 연락을 취했던 피고 ○○○에게는 징역 8개월을 구형합니다.”




 이 검사가 구현하는 신화는 엄밀하게 말해 객관적이고 공정한 법원의 그것이 아니다. 청사초롱 도상의 의미를 자의적으로 밝혀주는 방식으로 논리를 전개하고, 그 전개의 절정에서 사용되는 ‘아이들의 꿈’ 이라는 토포스를 효과적으로 쓴 고전 수사학의 담론에 가까웠다. 마치 신약성서에서 예수의 신성을 주장하는 사도바울이 썼을 법하고, 정치 연설장에서 오바마가 써야할 것 같은 대중의 감성을 사로잡는 은유로 가득한 문학이었다. 


  낙서라는 예술행위를 이데올로기적으로 바라본 그들이, 아이러니하게도 이데올로기적으로 명백해야할 순간앞에서는 문학적이고 수사학적인 예술의 방식으로 근거를 제시하려고 했다. 그들의 근거는 비약이 심했다. 그들의 구형을 선고한 논리에 따르면 아이들의 꿈을 강탈한 죄는 징역 10개월 구형사유가 되는 것이다. 더욱이 그 사유의 전제로 언급한 청사초롱의 의미, 청사초롱을 들고 있는 주체에 대한 주장도 ‘참’ 이라고 말 할 수 없는 가치판단적 사안이다.

  이 지점에서 롤랑바르트가 그의 저작 <현대의 신화>에서 “도미니시 혹은 문학의 승리”부분에서 언급한 ‘매개신화’의 개념과 상통하는 점이 있다. 도미니시를 죄를 묻는 그들이 했던 그 방식과 쥐벽서 사건을 구형하는 검사의 발언에는 ‘매개신화’가 등장한다.

  
그 죄의 근거를 정의해야 할 근거에 또 다른 신화를 구성하는 방식으로 설득력을 얻으려 하는 것이다. 도미니시의 기질을 문학적으로 묘사하여 범죄자로 정의하는 방식이나, 쥐벽서를 그린 사람을 범죄자로 정의하는 방식 모두 사법기관의 권력을 구성하는 담론-신화 체계와 무관한 방식이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