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보기

쥐벽서 혹은 문학의 승리 #2

3연작으로 예상했는데... 과연 모르겠다ㅋㅋ1탄이 나오고 한달 후에나 작성해본다.

 <지난이야기>  # 쥐벽서 사건의 개요 

 
  2010년 10월 서울 도심에 공공설치물에 ‘쥐’를 낙서한 대학강사가 불구속 기소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공공시설물에 손상을 입힌 죄 치고는 이례적인 처분이었다. 
이례적인 처분 덕택에 무명의 대학강사는 뉴스의 주인공이 되었고 그의 낙서는 인터넷을 통해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뱅크시의 예술을 한국에서 만난 느낌이었다.  

  사건을 접한 대중들은 웃음거리로 받아들였고, 일종의 해프닝으로 끝나는 듯 했다.
그런데 사건을 기소한 검찰은 너무나 진지하게 반응했다. 검찰은 사건을 중대한 범죄로 가정했다.

  검찰은 이랬다. 전세계의 선진국가 대표들이 모이는 G20 회의를 방해함으로써,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국격을 손상시키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결국, 공안과 검사가 사건 조사에 착수했고 검사는 그 대학강사의 행위에 배후가 누구인지 알아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사건은 블랙코메디가 되었다.

  그리하여 해프닝은 큰 사건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웃자고 한일에 죽자고 달려든 사법기관에 대해서 시민들은 조롱했고,  웃음거리가 된 수사기관들을 다룬 패러디물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진출처 : 트위터 
@hongdrixgo




<시작>

#2 촌스러움과 오래된 신화

   쥐 벽서 사건을 2011년, 인터넷 뉴스에서 보았을때 나는 느꼈다.  그것은 국가기록원에서 대한
늬우스를 보았을 때나 느낄법한 촌스러움 이었다. 


  행정 기관이 홍보하는 메세지를 훼손한 행위를 공공선의 파괴로 확대 해석해서보는 시선을 가진 이가 뉴스에 나타났다.  


  장당 3만 5천원하는 홍보물 20여 장의 훼손 가치를 지적해야 할 검찰은 물었다.

  
"포스터 속의 청사초롱과 번영에 대한 전국민적인 꿈을 훼손한 죄를 어쩔꺼냐고?"

 
마치 대중 가요의 가사를 지적했던 유신시대의 권력자들처럼 능숙하게 말했다.
상상력 마저 선점하여 창작물의 사회경제적 영향력을 대신 걱정해주는 그런 행동..
그건! 한국 언론사 시간에 봤던 땡전뉴스의 감성이었다. 

도대체 번영에 대한 전국민적인 성원을 어떻게 저렇게 쉽게 말을 하는지?... 
그 꿈의 가치가 공유되지도 않았는데, 훼손한 죄를 어떻게 물을 수 있는지...
낙서 한번 한거치곤 참 대단한 의미였다. 

젝슨폴록이 페인트 찌끄려두고 액숀페인팅이라고 했던 그런 아트?
뒤샹이 변기통이며, 옷걸이 주워다가 레디메이드라고 말한 그런 아트?
현대 미술사 시간에나 듣던 어마어마한 차원의 의미부여를 검찰이 했다.

그들의 발언으로인해, 쥐 한마리 그린 낙서는 곧,
번영에 대한 전국민적인 성원에 뒷통수를 날린 커뮤니케이션이 되었다.



  뭐가 되었든!ㅋㅋ 이 그림과 이 사건은 야시꾸리한 감성을 21세기에 느끼게끔 만들었다.


지금이 민주화 정부가 아닌 것도 아니고, 국가주의 감성이 용인되는 맥락도 아니기에 어쩌면 그것은 현실이라기보다는, 블랙코메디의 감성을 가진 문학작품에 가까웠다.

  그 작품을 바라보노라면 오묘한 답답함이 느껴졌는데...
개발과 성장이라는 명분으로 국민 개개인의 권리를 밟아 제끼는.. 
집단의 효율성과 인권을 교환할때 나타나는 특유의 구린내였다.

이런 구린내를 잘 맡고, 또 구린내를 멋지게 지적한 비평한 학자가 있다.   


그는 '롤랑바르트'이다. 

 프랑스인인 바르트는 소쉬르의 기호학을 사회현상에 확장한 비평가이다. 잘생기긴 한거 같다.

기호학 시간에 배운걸 정리하자면,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의미를 구성하는 기호임을 말한 소쉬르의 분석 틀을 발전시켜서 사회 전반의 의미화 과정을 '기호학의 틀'로 탐구했다고 한다.
어려운 기호학ㅠㅠ 어려워도 차분히 읽어보자.

  롤랑바르트는 사회 구조속에서 주체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특정 상황에 비판적인 시선을 제시 하는데 능했다고 한다. 그는 각 구성원들이 이질감 없이, 투명하게 바라보는 가치를 ‘신화’(mythology)라고 말했고, 그에게 '신화’는 인간 차원의 권위와 힘을 유지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하는 시스템이었다. 

 그렇기에, 신화는 특정한 기호가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소통되게 하는 전략무기인 샘이다. 이데올로기성을 강하게 지닌 메세지, 즉 특정 가치로 가득해서 수용하기에 불편한 메세지도 신화화의 과정을 통해 구성원에게 자연스럽게 보이게 만들 수 있기에 무서운 것이다. 

  앞서 쥐벽서 사건을 처음 접할 때 느꼈던 촌스러운 그것을 바르트의 신화론으로 말할 수 있다.  촌스러움을 초래한 그것은 이미 오래전 맥락에서는 자연스럽게 소통되던 ‘신화’였다. 

개인보다 앞설 수 있다는 국가, 그 패러다임이 나에게는 자연스럽지 못한 사고체계로 다가왔지만 

오늘날의 맥락에서 전혀 소통되지 못하는 의미체계는 아니다. 
국익/국격/국가경쟁력 등으로 그 신화의 흔적은 최근에도 빈번하게 나타나기에 그렇다.

더욱이 쥐벽서 사건의 밀접한 배경이 되었던 G20와 같은 국가 간 회담, 월드컵과 같은 국가 간 대회에선 더욱 빈번하다. 적어도 특정한 상황에서는 '국가주의 신화'는 자연스럽게 소통된다.
아래 사진과 같은 상황이 벌어지는걸 보면 느껴지지 않나?


  그러나 적어도 2011년의 오늘은 그 신화를 미학적으로 촌스럽다고 느낄 수 있는 시대로 변하긴 했다. 자연스럽게 누구에나 투명하게 사용되는 신화는 아닌 게 되었다. 특정한 이벤트의 시기와 특정 세대에게는 유용한 신화 일 수는 있으나, 그것이 동시대적이고 전세대적으로 자연스럽게 소통되는 의미 생성의 틀은 아니라고 볼 수 있겠다. 

  이러한 시선으로 쥐벽서 사건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해본다. 쥐벽서는 새로운 신화의 흔적을 보여준 것이다. 새로운 맥락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신선한 기호로의 '쥐벽서'로 그 의미를 둘러싸고 오래된 신화와 새로운 신화간의 충돌이 일어났다. 

 
쥐벽서 사건의 본질은 신화간의 '충돌'이 아니었을까?

전자의 오래된 신화는 국가주의적 사고를 함의한 의미체계이고,  후자는 국가기관이 주도하는 의미작용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새로운 사고방식일테다..




#3 사법기관의 권력작용 그리고 신화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