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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보기

직업에 귀천이 없으나, 소명에는 귀천이 있다. -크리스천의 이중적인 사고-

  우리는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말한다. 이 말에 동의하기는 쉽다. 타인이 하는 일에 '위-아래'의 편견을 피하는 일은 바람직한 일이기 때문이다. 모든 직업이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고, 각자의 쓸모를 발휘하고 있다고 보는 것도 딱히 손해 볼 것 없는 생각이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에 동의하는 것은 무릇 '있어 보이기'도 한다. 타인이 하는 일에 높고-낮음의 평가가 이 땅에 만연한 사실이기에, 그런 문화와 구별되는 사고방식은 마치 교양인의 조건처럼 보인다. 더구나 그것이 '자유-평등-박애' 정신에 입각한 아주 민주적인 생각임에 의심할 여지조차 없기에 탁월한 논리로 사용된다. 직업에 높고 낮음이 없다는 말은 제대로 통하고! 먹히는! '이데올로기' 인 것이다.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는 것 같은 그래서 '공정사회' 브랜드를 달고 있는 명품 사고방식이다. 그런데 묻고자 한다. 나의 직업에는 귀천이 진짜 없는가? 너의 직업은 '있어 보이는' 방식으로 봐줄 순 있더라도 내가 평생 해먹고 살아야할 그 일에 대해선 뭔가 다른 것이 있지 않는가?
 


   크리스천들이 직업을 말할 때 자주 쓰는 표현이 있다. 바로 '소명'이라는 말이다. 주님의 주신 '비전' 만큼이나 자주 쓰인다. 자신의 일에 고차원의 의미를 부여하는 언어이다. 이것 또한 '있어 보이는' 언어이다. 모든 것이 상품으로 소비되는 시대에, 그것을 가능케 하는 노동은 인간의 몫 이었다. 그런데 인간의 차원으로 알던 노동이 하나님의 소명(calling)이고 하나님이 보여주신 비전(vision)이라니! 정말 제대로 통하고! 먹히는! 말이다.

  

  '있어 보이는' 그것들을 나는 '껍데기'라고 부른다. '껍데기를 가라' 외치던 어느 시인의 언어를 빌리지 않아도 껍데기의 속성은 통한다. 있어서 좋지만, '알맹이' 없이는 껍데기는 쓸모가 없다. '있어 보이는' 언어 또한 '있어 보이는' 실체 없이는 쓸모가 없다. 어쩌면 그 이상일 수 있다. 거짓을 만들어 통하고! 먹히게! 만드는 이데올로기로 쓰임 받기 때문이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지만, 소명에는 귀천이 있다. 이것이 나의 진짜 모습이다. 교양인으로 자라났기에 직업의 높고-낮음에 있을 편견을 두려워한다. 타인에 한해서 말이다. 그러나 나를 향한 주님의 소명에는 귀천이 있다. 귀하게 쓰임 받길 원하는 마음이 있다. 나의 일은 직업 이상의 의미니까 귀천이 없는 단순한 '직업'과 다르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이기에 있어 단순한 의미가 아닌 것이다. 세속과 구별되는 정도의 사고방식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주님의 부르심이라는 고차원의 의미도 부여하는 것이다.

 

  그 결과는 어떠한가? 나의 직업은 주님 주신 소명이고 비전을 성취할 수단이기에 절대 '잉여'로울 수 없다. 시장의 수요가 없이 버려진 일은 하나님이 원하는 일이 아니다! 시장의 수요가 들끓고, 안정되어 보이는 일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효과적이다. 세속의 성자로 사는 우리는 주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 '있어 보이는' 자리에 올라가야 한다. 그곳에 올라가서 복음으로 이 땅을 변혁시켜나가야 한다. 그것이 효율적인 방식이다. 노동을 하나님의 차원으로 설명하던 우리가, 이제 인간의 차원으로 효과를 논하기 시작한다. 높은 자리에서 영광 돌리는 것이 세속에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효율적인 방식이라는 인간의 차원이 작동한다. 


  나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은혜로 있어 보이는 대학에 왔다. 그것에 감사하며 살았다. 이제 하나님이 주신 소명과 비전으로 있어 보이는 직장에 갈 차례라고 믿는다. 그것이 주님 주신 은혜니까...서울의 송파구 잠실동을 지역기반으로 하는 자유로운 몸매, 아름다운 인간. 위대한 대학생 오지랖에게는 나름의 취향이 있다. 춥고-배고프고-피곤하고-무시당하는 일은 나의 취향이 아니기에 무던히 거부한다. 신자유주의적인 시장세태를 비웃던 나이기에, 시장 바깥의 영역에 도전 한다고 말은 잘 하고 있다. 하나님이 주신 '소명'은 수 많은 언어 속에서 포장되어 이미 그 실체가 보이질 않는데도 말은 잘한다. '있어 보이는 것'들은 나의 취향의 흔적이라고 합리화되었고, 그렇게 소명과 비전이 거짓으로 바뀌는 현장에 지금 내가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