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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했던 순간 - 내 생애 첫 대중강연을 회상하며..

벚꽃이 휘날렸던 봄날은 지나고, 5월의 축제가 시작할 즈음이었다. 일감호에는 배가 등장했고 학교 구석구석엔 사람들이 주점 준비로 분주했다. 매년 반복되는 축제모습이기에 4학년 쯤 되면 무던할 법도 했지만 나의 마음은 오히려 신입생보다 더 들떠 있었다. 한달 전부터 준비했던 키노트파티에서의 발표가 바로 오늘이기 때문이었다. 
 

   오전 수업을 후다닥 마치고 행사가 있는 연세대학교로 향했다. 너무나 식상한 신촌 유흥가를 지나 이국적인 그래피티가 있는 굴타리도 지났다. 연세대 또한 우리학교처럼, 축제의 분위기로 시끄러웠다. 허겁지겁 도착한 그곳에서, 학생회관을 찾아 해맸다. 너무도 다녀보고 싶었고 또 아름답다고 소문난 학교였지만 내 머릿속에는 발표에 대한 부담 때문인지 아무것도 새롭게 보이지 않았고 무사히 리허설 시간에 맞춰 도착하기만 바랄 뿐 이었다. 학생회관 3층 ‘푸른샘’이라고 불리우는 그곳은 빨간 벽돌로 이뤄진 아늑한 중강당이었다. 숨 돌릴틈도 없이, 차가운 주스 한잔을 들이키면서 리허설 무대에 섰다. 몇명이 오는지 누가 오는지도 모른채 리허설을 마쳤다.         
 

  시간이 흐르고 객석은 다양한 단체에서 온 학생들로 가득찼다. 여러 단체에서 온 연사자들의 스피치가 시작되었고 즐겁게 웃고, 즐기다 보니 내 차례가 왔다. 내 이름이 불려지고, 사람들의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무대 위에 오를 차례가 온 것이다. 프로젝터에 내 맥북을 연결하자마자 무대위에 올랐다. 떨리는 두발에선 무대 마룻바닥의 작은 삐끄덕거림이 느껴졌다. 빔프로젝터가 쏜 빛은 너무나 밝았고 나는 무대 바닥에 있던 묵직한 마이크를 들었다. 그 순간 알미늄으로 된 프리젠터 리모콘을 든 손이 바르르 떨렸다. 그래도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수 십번 연습했고, 수 백번은 수정했던 머릿속 시나리오에 따라 인사를 했다. “방갑습니다, 건국대학교 커뮤니케이션학과에 재학중인 스물세살 청춘, 오정택 입니다.” 
 

   그런데 아뿔싸! 다음 슬라이드로 넘어가야할 내 맥북이 갑자기 반응하지 않았다. 발표를 위해 맥북용 리모콘과 외부모니터용 젠더도 꼼꼼히 준비해왔건만 멀쩡했던 맥북이 프로젝터와 연결하고 먹통이 되어버린것이다. 객석엔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내 머리는 하얘졌다. 준비했던 모든 순서가 기억나지 않았고 오직 모든 청중의 눈길만이 무게감으로 다가왔다. 이대로 모든 발표가 허무하게 끝날 것만 같았다. 잠시의 시간이 흐르고, 진행자는 다음 차례의 발표를 먼저 듣고 이후에 하자고 했다. 나는 그렇게 무대를 내려와 객석앞에 주저 않았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모든 상황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산지 한달도 안된 맥북의 예상치 못한 오류에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혼자 되내었다. “현장엔 다른 맥 컴퓨터는 없다. 키노트 파일을 구동시킬 방법은 내 랩탑이 유일할꺼다. 따라서 발표할 방법은 없다!”
 

 

   모든 것이 꼬여가는 그 순간 옆자리의 한 친구가 조용히 내 귓가에 속삭였다. “괜찮아, 잘 될꺼야... 기다려보자, 자자 차분하게 마음 잡고 기도해보자” 예상치 못한 상황에 얼어붙은 나를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해 준 친구는 ‘의정’이었다. 2학년때 만나 지금까지 소중한 여자친구로 있어주는 그녀가 오후 수업을 마치고 옆에 나타난 것이다. 그녀의 미소에 마음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적절한 순간에 갑자기 나타난 그녀가 너무나 이뻐보였다. 다른 연사자의 발표가 진행되는 동안 노트북을 껐다가, 켰다. 그리고 해상도 퀄리티를 낮추고 프로젝터와 연결하고 무대에 다시 올랐다. 떨리는 손으로 프리젠터를 눌렀고, 다행히도 화면은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수 십번 연습한대로 오프닝을 시작했다. “미디어 메세지다”라는 논리의 전제를 설명함으로 발표가 시작되었다. 매체와 그 내용은 떨어질 수 없음을 간단히 말하고, 미디어와 메세지의 결합이 ‘문화’임을 도식적으로 보여준 후! 대학의 매체라고 할 수 있는 학교 게시판을 다룬 사진들을 차근차근 보여줬다. 그 매체속에 담긴 매세지를 살펴본 후에 무대 구석에 숨겨두었던 ‘바나나맛 우유’를 그냥 들이켰다. 바싹 마른 입이라 시원하게 마셨다. 스피치를 하던 도중에 갑작스레 마셨던지라, 사람들은 궁금해 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나는 빈 바나나맛 우유곽을 들고 청중에게 물었다. “이 속에 바나나가 얼마나 있을까요?” 청중은 무언가 확신한 듯이 웃었다. 그렇게 내가 바라본 ‘대학문화’가 어떤건지 청중은 이해하는 듯 했다. 바나나 안들어간 바나나 우유, 대학생의 이야기가 사라진 대학의 게시판이 묘하게 일치된다는 나의 논지가 통한 것이다. 토익이니, 오픽이니 하는 영어시험과 각종 자격증 학원들의 광고, 기업의 공모전과 인턴모집들만 있는 요즘 대학의 게시판은 뭔가 문제가 있다는 말이 었다. 가짜 바나나맛 우유를 달콤하게 느끼는 우리의 취향 때문에, 학교 게시판의 정보에 우리는 유혹되고 결국 대학생은 모두가 비슷한 잣대로 평가 받아야하는 상황. ‘스팩경쟁’으로 설명되는 두려움 앞에 서있다는 것을 말했다. 진짜 바나나는 안들어간 그 맛, 달콤한 조미료로 만들어진 그 맛에 우린 길들여졌고 이제는 본질보다 가짜를 더 선호하게 된 우리들에게 문제가 심각함을 우스꽝스러운 사진들로 설명했다.
 

   그 즈음 예정된 시간이 초과되었다. 발표 규칙에 따라서 마이크가 꺼졌다. 그러나 나는 멈출 수 없었다. 진짜 할말은 이제부터였다 나는 마이크를 무대 구석에 내려놓고 목청높여 외쳤다. “우리가 맛있다고 느끼는 바나나맛 우유! 맛있어 보이는, 화려하고 성공적인거 같아 보이는 생활들을 별 고민없이 따라다니지 마세요, 그러다가 행복없는 가짜인생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직접! 질문하고, 직접! 뭔가를 시도해보면서, 레알문화를 만드는 걸 도전해보세요. 뭐가 되었든 선택은 여러분이 하시는 겁니다.” 하고 무대를 내려왔다.
 

  내 생애 첫 대중 강연이었다. 평생의 비젼을 미디어, 문화연구자, 리터러시 교육가로 잡아왔다. 그 무대가 대학이든, 학원이든, 교회이든, NGO이든 ‘문화’는 내 평생의 키워드 일 것이다. 학부 4학년 두학기를 남겨둔 어느 5월에 나는 그 키워드에 대해 직접 질문했고, 그 가치를 전했다. 모든 것은 재미있었다. 청중의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고 인기상의 영예도 얻었다. 무엇보다도 그 순간을 소중한 여자친구와 함께할 수 있었다는 점. 내가 행복한 이유이다.